적묘의 발걸음/한국-이곳저곳

[양관으로 운현궁을 제압하다] 경술국치 100주년에 쓰다

적묘 2010. 8. 28. 16:51

운현궁 양관을 위에서 내려다 본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이르게 간 바람에

무심코 계단을 올라가 그 건물 꼭대기 층에서 주변 경관을 바라보다

눈에 선명하게 저건 뭐가 하고 한참을 바라보았으니까

그렇게 안국역과 인사동 주변을 돌아다니면서도

무심코 지나가곤 했었는데

눈에 너무나 선명하게 박혀

면접이 끝나자 마자 운현궁으로 달려가야했다.





화창한 하늘 아래 국적 불명의
남산타워와 국세청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떨어뜨리니


과거와 섞인 현대

운현궁이 초라해진다






현재의 운현궁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고 종이 즉위한 다음, 이하응(李昰應)은 흥선대원군이 되었고,
 살아있는 임금의 아버지였던 그는
운현궁에서 섭정을 통해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대원군의 운현궁은 궁궐에 견줄만큼 크고 웅장한 규모까지 커졌다



그러나

지금의 운현궁은 그때의 운현궁이 아니다


이 부근은 원래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의 사당이 있던 자리이며
운현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운현궁 내에 자리 잡은 양관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 건물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소유였다가,
해방이후인 1946년에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에 들어가고 싶어서



축소된 운현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양관은 더이상 운현궁 소속도 아니다


표를 파는 곳에서 친절하게 안내해주신다

양관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건물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지는
본인도 알 수 없으며

정면을 보고 싶다면

옆 건물인 덕성여대로 들어가라는 것!



실제로 운현궁에서 볼 수 있는 전경은 이정도이다.


이 왼쪽에는 운현궁 사진전시관과 기획전시관이 있다
 수직사, 노락당, 노안당, 이로당, 영로당, 양관의 뒷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제의 압력으로 집의 규모는 점점 줄어 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안방이었던 아재당(我在堂)은 사라지고,
현재는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고종이 가례를 올렸던 안채인 노락당(老樂堂)과 별채인 이로당(二老堂),
경비와 관리를 담당하던 사람들이 기거하던 수직사 정도만 남아 있다.

운현궁은 궁의 위용과 화려함과는 조금 거리 있는  아늑한 집의 느낌이 강하다


대원군의 조부와 부친의 사당도 없어지고,
고종이 창덕궁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때 쓰이던 전용문이었던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 이용하던 공근문(恭覲門)은
모두 헐리고 흔적만 남았을 뿐이다.


바로 옆 건물...




쭉 뻗은 도심 속의 공원같은 길을 걷다보면

잘 정비된


길 끝에 드디어 양관의 정면이 보인다.





경술국치(庚戌國恥)는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원군의 조상 사당이 있던 곳엔

이렇게..

일제는 양관을 지어 운현궁을 눈 아래 굽어보게 한 것이다.


1911년에 설계, 1912년에 준공된 것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명확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대한매일신보와 황성 신문에는 그 관련 기사가 남아있다고 한다.


1908년 4월 11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이준용의 어머니가
대원군이 건축한 가옥을 훼철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퇴위한 고종도 운현궁에 양옥건축을 하지 말도록 명령하자 잠시 건축이 중지되었다는 기사가 실린다.




그러나 1908년 4월 22일자 대한 매일 신보 에는

당초 100칸을 훼철하려던 계획에서 몇 십칸-30칸-만 헐고
양식 건물을 그대로 추진한다는 기사가 실린다.





지금은 덕성여대평생교육원의 건물로

남의 사무실이라

안에 들어가는 것엔 약간의 무리가 있었다.




길을 가다 들어갈 수 있는 그냥 예쁜 공원같은

이런 곳에

웨딩 촬영하기 좋은 예쁜 건물이 있구나 하고

고건물 보듯 보는 것이 아니라



창경궁에 박물관이란 양관(후에 장서각)을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지어 창경궁을 제압하도록 한 발상이나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운 발상이나

모두 하나이리라..


매년 꽃은 피고

나비는 날아들고

바람은 흐른다




역사책을 펼치는 것 만으로는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책을 펼칠 기회 조차 없다니


경술국치 100주년을 기억하는 이날, 더 가슴이 아프다.


이젠 또 어떤 방식으로 누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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