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묘의 발걸음/한국-이곳저곳

[충청북도 문화재] 배티성지, 최양업신부 성당터 [공감블로그]

적묘 2011. 8. 21. 08:00



1810년 신유박해로 인해

서울과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충청도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로

박해가 계속 될 수록
초기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산간지역으로

숨어들게됩니다.



배티에도 비밀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는데요.

기해박해 1839년
병오박해 1846년을 거쳐 1866년 병인박해까지...

기록에 이름이 남는 교우촌만 15곳에 이르게되죠~


여긴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이지요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 마을이랍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마카오의 조선교구 신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소팔가자에서 부제 수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님은
상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 수품을 받으셨지요.




한국 천주교회의 첫번째 신학생이며
두번째 사제랍니다.



요동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전개하다
13년만에 홀로 조선으로 귀국




 
최양업 신부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순방을 하였는데
 


1850년부터 1861년까지 프랑스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맡아
사목활동을 전개하였고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숨어지내다
베르뇌(S.F. Berneux) 주교에게 사목활동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던 중 문경에 있는 교우촌에서 과로로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박해 때문에 신자들의 고백성사가 밀려 있었고,
산간의 여러 공소에서는 신부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지요.

그런데도 신부 수는 절대부족하였던 시기였으니
이런 상황에서 전교에 힘쓰다가 과로로 쓰러졌고
설상가상으로 식중독이 겹쳐- 어떤 자료에는 장티푸스라고 하더군요

 


1861년 6월에 사망한 최양업 신부님의 장례는

 배론신학교에서 베르뇌(Berneux,S.F.) 주교에 의하여 거행되었습니다.





초기의 두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과 그는
 ‘피의 증거자(순교)’와 ‘땀의 증거자(순직)’라고 일컬어집니다.

12년에 걸친 지칠 줄 모르는 전교활동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지요
 


최양업신부의 활동과 업적은
그 동안 김대건의 순교에 가려 있었지만
최근에 이르러 활발히 연구되고 있어요


조선말기 역사+ 진보적인 사상의 도입면에서도
최양업 신부님의 연구가 아주 재미있답니다.

특히 직접 쓴 라틴어 편지들과 번역한 기도서들도 있고
올바른 선교정책의 수립에 대한 견해와
양반제도의 폐지, 국가 인재등용의 문제와

조선 선교사 파견 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습을 익힐 것과
프랑스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에 대한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 등

그 당시 시대를 그대로 읽어낼 수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신부님의 면모를 볼 수 있답니다.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역사의 흐름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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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 요약

1. 박해로 인해 산지로 가다->더위를 피해 산으로 가다

 2. 성지에 가면 시원하고 꽃도 많답니다~

3. 한국의 천주교는 아주 독특!! 학문으로 시작한 진보적 시각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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